췌장암 – 25년 3월 19일 아빠가 떠났다.
췌장암 투병의 끝, 아빠가 떠났다.
전립선암에 이어 췌장암을 진단 받고, 몇 년 전부터 아빠와의 이별을 수 없이도 생각하고 상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안녕 일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아빠는 아빠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이별을 고했다.
나는 지난 3년동안 아침에 일어나면 췌장암 환자 카페에 들어가서 글을 살펴봤다.
아빠와 통화하면서 아빠에게 췌장암에 관한 새로운 증상이 나타날 때 마다 자료를 찾아보고, 후기를 찾아봤다.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라고 답을 받을 때면 안심했고, 이내 불안해 했다.
나는 이렇게라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내 말만 온전히 듣고 의존해야 했었던 아빠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을까
수치가 올라갈 때마다 아빠는 본인이 했던 생활이나 행동을 곱씹으며
수치가 올라간 이유가 뭘까 생각하고 본인만의 답을 내놓곤 했었다.
췌장암 젬시타빈 항암을 잠시 멈추고 휴약하는 그 한 달 사이,
CA19-9 수치는 90대에서 1000대로 치솟고 다시 두 달 만에 4천대로 높아졌다.
CA19-9 수치가 급격하게 올라갔기에 우리는 약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젊은 사람도 힘들다는 폴피리녹스.
평소에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아빠도 1차 항암을 마치고 난 뒤에는
완전히 K.O 된 것 같다고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토록 자존심이 센 아빠가, 본인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늠도 못하겠다.
3월 5일 아빠의 2차 항암 때 내가 제주도로 내려가서 하룻밤 같이 잔 것이 아빠와 함께 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그래도 5-6인실 아저씨들만 모여있는 입원실에서
딸이 하룻밤 지내러 왔다는 사실에 다른 아저씨들은 부러워했고,
아빠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와 있는 내내 웃음을 보였다.
그 하루 동안에도 역시 아빠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채무 관계 정리해라,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슬슬 주변 정리를 해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딸이 말하기엔 다소 냉정하다 싶은 이야기들을 건내었다.
“이런 이야기 나말고는 아무도 못하잖아. 내 말 듣고 하나 둘씩 정리 하는게 좋을 것 같아”
라고 이야기 했을 때는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는 머리카락이 빠지는 걸 감추기 위해 오빠의 모자를 쓰고 왔었는데, 나와 함께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3차 항암을 하러 가기 전 자꾸 2-3초 정도 잠에 빠진 듯한 기면증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주말에 아빠와 통화했을 때는 컨디션 다 돌아왔으니 걱정 말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실은 주말 동안 쪼그려 앉아있는데 저 증상이 나타나서 두 세번 정도 넘어지셨다고 했다.
그때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증상이라 생각을 했는데,
뒤돌아서 생각해보니 나의 생각보다 아빠의 몸 안에서는 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나 보다.
자존심이 강한 아빠는 본인을 환자 취급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었고,
아프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그래서 누가 부축하려 하는 것도 늘 마다했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지켜봐 왔던 나의 소원은 아빠가 주무시면서 편안하게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아빠는 아빠처럼, 그리고 나의 소원처럼 그렇게 떠났다.
비록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계셨지만,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고, 긴 싸움을 하지도 않고, 우리 고생도 시키지 않고,
잠을 자던 평소의 아빠의 모습처럼 그렇게,
작년 12월 아빠와 같이 다녀온 하노이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한 여행이 되었다.
아빠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서 생각보다 아빠의 사진이 많이 없었다. 특히나 웃는 사진을 찾기 힘들었는데,
이번 크루즈 여행 때 찍은 사진 중에 아빠가 활짝 웃는 사진이 있어서 그걸 영정 사진으로 사용했다.
빈소가 차려지고, 그 사진을 보니 아빠가 참 행복해 보였다.
아빠와 병원을 함께 다니는 몇 년 동안 혼자 수없이 연습했던 아빠와의 이별 연습 때문이었을까
임종 때 말고는 나는 눈물도 많이 나오지 않더라.
다만 혼자 있을 때는 울컥하는 때가 많아지는 것 같다.
늘 습관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아빠한테 전화 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한다.
오늘도 샤워를 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아빠에게 전화하려 하다 이내 멈추었다.
곧 익숙해지겠지.
아빠의 부재가 아직은 낯설다.
아빠가 떠난 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는데, 아빠에게 해줄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아빠 덕분에 경험하게 된 일들이 너무나 많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어디에 있던지, 무엇을 보고 느끼던지 아빠는 나와 함께 있겠지?
지난 몇 년 간 여행을 다니며 교회, 성당, 절에 갈 때마다
내가 비는 소원은 아빠의 완치였다. 아니 완치가 아니더라도
아빠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몇 년만 더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혹시나 돌아가신다면 평화롭게 주무시면서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이제 나는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하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직도 조금은 엉망이지만
아빠는 나의 우주였어. 나의 아빠로 살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