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6.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드 보통

인류학자라 칭해도 될 만큼 깊은 관찰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알랭드 보통, 맘에 닿았던 문장들

알랭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드 보통의 글, 내 마음에 닿았던 문장들

감정적인 벌거벗음은 남에게 자신의 약함과 모자란 부분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된다. 거기에 의존하면, 우리는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외의 다른 방법으로 어떤 인상을 심어줄 능력을 빼앗 기게 된다. 더는 거짓말하거나 허세 부리지 못하고, 뽐내거나 미사여구 뒤로 숨지 못한다 몽테뉴는 감정적으로 벌거벗게 되는, 죽음을 맞는 순간에는 단순한 프랑스어(자신의 모국어로말해야 한다고 했다.

내 필요를 고백할 때는 감정적으로 벌거숭이가 된다- 당신이 없으면 헤매게 될 거라고,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며, 인생의 방향이나 의미도 모르는 형편없이 유약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울면서 이야기할 때, 남들이 그 사실을 알면 끝장이지만, 나는 당신이 비밀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다.

파티에서 유혹적인 시선을 던지는 게임을 그만 두고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은 바로 당신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 고 나면, 나는 조심스레 빚어온, 단단한 허상을 벗어버린다. 나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서커스 묘기에 나선 사람처럼 판에 묶 인 채 상대방을 믿어버린다.

그는 내 피부에 스칠 듯 비수를 던 진다. 내가 자의로 그에게 내준 비수를. 나는 당신 앞에서 초라 하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동요하며 자신감을 잃고 자신을 증증오 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필요한 경우) 그 반대 모습이 되리한 결 당신에게 설득할 수가 없다. 새벽 3시에 접에 질린 얼굴을 당 신에게 보일 때면 난 약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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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감정의 옷 입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른 속, 상징적인 생식기의 약함, 당신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비밀을 남에게 들 키지 않도록 만든 옷장 전체로 이루어진다.

옷을 입는다는 것 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사람, 곧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림으로써 우리를 미치게 하거나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에릭은 연애를 할 때마다 이중 안감을 넣은 양복으로 옷장을 채웠다. 사랑이 대들보가 아닌 삶, 행복의 토대를 자율이 아닌 다른 것에 양도할 필요가 없는 삶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이 점에서 우리는 건축가들을 낭만파와 지성파로 나눌 수 있 다. 지성파 건축가는 건물의 무게를 여러 기둥 (많을수록 좋다) 에 분산하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아, 사고가 나더라도 다른 기둥들이 무너진 기둥의 몫을 나누어 지도록 한다.

에릭은 무게를 폭넓게 분산했다. 여자 친구를 몇 명씩 유지하 는 것(거절을 당하더라도 곧바로 구조가 무너지지 않도록 위험 을 줄이려고), 어느 집단이 등을 돌려도 생존할 수 있게 충분히 많은 집단과 교제하는 것, 어느 거래가 실패해도 견딜 수 있게 돈을 많이 버는 것 등이 그 남자가 세운 기둥들이었다.

p.225

a)외모

b)직장

c)돈

d)능력

그래도 자신은 남게 될 터였다.

그래서 사랑의 동기에서 그런 기준은 배제하고 싶었다. 그녀의 존재에 부차적인 것들이니까. 그것들은 그녀의 통제 밖에서 위태롭게 존재했다. 지금은 매력적일지라도 어느 날엔가 사라질 것들이었다.- 더불어 그녀를 사랑하던 이도 사라지겠지

사랑받는 이유들을 이렇게 초조하게 찾는 것과 진실을 찾으려는 데카르트의 힘겨운 여정을 연결지어 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그의 전설적인 해답은, 몽테뉴와 갈릴레오, 가상디의 철학에 내포된 회의를 넘어서는 도구였다. 이들을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을, 사물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톨해 보이는 것과 신질로 같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라고 물었다.

​사랑의 진정한 기준을 찾는 일도 비슷한 궤도를 따랐다. 회의적인 태도란, 피상적이고 거짓된 것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랑의 동기로 규정한다는 의미일터이다.

누군가 아름답고 부유하고, 지성적이거나 강인해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 들은 우리가 상대의 욕망속에서 찾는 핵심요소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거나 운이 나쁘면 쓸려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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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흥미롭게도 지리적이라기보다 심리적인 활동으로 읽을 수 있다. – 외적인 여정은 내적으로 욕망하는 여정의 은유다.

네팔에서 히말라야를 오르고, 카리브 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로키 산맥에서 스키를 타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도타기를 하고, 이러한 것들은 이국적이고 유익하지만, 훨씬 심오한 동기를 가리는 시시한 변명에 불과하다. 그 동기를 여행을 예약하는 자신이 이런 활동을 즐기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여행사는 비행기 표와 호텔 방 예약, 보험 가입 샅은 사소한 일을 처리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의 기본 업무는 여행 상품을 사면 기적처럼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리라는 미묘한 환상에 근거한다. ‘나’ 가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이 ‘나’를 바꿔주리라는 생각이다.

앨리스가 런던에서 상상한, 휴가 여행중의 자신에게는, 삶을 어렵게 하는 모든 게 없었다. – 앨리스는 의심, 피로감, 초조함, 권태, 갈망에서 벗어난 누군가를 상상했다. 여행지에서는 기온이 25도 까지 오르고, 런던에서 생활 할 때와는 눈에 보이는 식물도 일상도 다르므로, 그런 풍광에 요구되는 역할로 쉽사리 빠져들리라고 꿈꾸었다.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이 되어 서구 문명의 문젯거리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의 병력도 벗어던지고, 신경의 무게도 덜어내리라고, 하지만 방갈로가 목가적이고 과일이 맛있고 모래가 부드럽고 따뜻해도, 중요한 것은 피해지지 않았다. 풍경이 아무리 근사해도 내면의 꾸밈새, 곧 내적인 지형이 우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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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신에게서 탈출한다”고 말하는 것을 단지 이런 저런 문제에서 도피하는 것으로만 본다면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여기서 자신이란 타고났으며 고치기도 힘등 난점들의 핵심으로 이해된다. 이런 것들은 어떤 특정한 것으로 환원 될 수 없다. –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직장’ ‘날씨’ ‘남편’ 에게서 탈출한다고 이야기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란 표현에서는 막연히 실존적인 권태, 항상 똑같은 육체에서 거주하며 정신이 활발해질 때에도 익숙한 생각의 창살에 부딪히고 만다는 무거운 좌절이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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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향이 어디예요?” 하고 물었다. 고향이 있다는게 무엇인가? 특정 지역 출신임을 느낀느 것, 특정한 기후나 특정한 토산품, ‘국민성’이라는 이상적인 정신 상태로 정체성이 규정되는 것. 앨리스는 다양성만을 인식했다. 런던에는 런던만의 건물, 거리, 삶의 방식이 있음을 이해했다-다른 도시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바르 미츠바를 본 병험과 세비야에서 성찬식을 본 경험을 비교 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먹는 빵과 시카고에서 먹는 빵 맛, 뉴역의 하늘과 런던의 하늘 빛깔을 비교할 수 있었다. 각 나라의 완고한 이들이 지닌 편견도 기억했다.

318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우리의 농담을 이해하면 우리는 재미난 사람이 되고, 그들의 너그러움이 우리를 너그럽게 하고, 그들의 모순이 우리를 모순되게 한다. 개성이란 읽는 이와 쓰는 이 양쪽이 다 필요한 언어와 같다. 일곱 살 아이에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말도 안되는 허접쓰레기이며, 만약 그의 작품이 일곱 살 아이들에게만 읽힌다면 셰익스피어는 그 아이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평가 받을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앨리스의 가능성도 애인이 공감해주는 한도에서만 뻗어나갈 수 있다.

319

관계의 기반은 상대방의 특성이 아니라, 그런 특성이 우리의 자아상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우리에게 적당한 자아상을 반사해주는 상대방의 능력에 기초해서, 에릭은 앨리스에게 어떻게 느끼게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알려주는가? 모든게 머릿 속 생각일 뿐인지, 실제로도 그런지 모르지만,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 남자와 같이 있으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남자와 함께있는 앨리스는 돈으 함부로 쓰고, 지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데 매달리고, 타인을 귀찮게 하는 의타심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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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똑같이] 주체의 무의식을 파악하는 왕도인 자동응답 전화기의 엄청난 심리적의의를 프로이트가 연구하지 못한 것은 오직 연대기적 불일치 때문에 생겨난 사고였다. 자동응답기의 구조상 주인이 전화가 걸려온 소식을 접하는 순서는, 먼저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다음에야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아는 것이다. 설계상의 특성에 따라, 전화가 왔다는 흥분과 전화 건 사람이 누군지를 확인하는 사이에는 중요한 간격이 생겼다-환상을 자극하고 형성 할 시간이 생기는 셈이다. 그 시간에 누가 전화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전화했으면하고 바랐는가 하는 속속내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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