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7.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김애란 작가에게 내 못난 마음, 내 감정들을 들켜버린 듯한 느낌
블로그에 옮겨놔야지 했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전에도 김애란 작가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었고, 가볍게 읽어 내려갔었다. 그 경험 덕분이었을까,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
‘단편 소설’이라고 책 커버에 써져 있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벼움을 기대한다.
가볍게 든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각각의 이야기들을 나의 마음을 후벼 팠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가 부끄러운 나의 수준 낮은 생각과, 유치한 질투, 못난 감정들을 그대로 종이 위로 꺼내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각 이야기마다 다른 의미의 공감을 했다. 책을 덮는 순간 왜 이 책이 나의 마음에 와 닿았을까 곱씹어 보았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는 회사, 외국인 친구들과의 생활 그리고 아빠였다.
그 시간들이 이 책의 이야기 속에 조금씩 녹여져 있어서 내가 특히나 더 공감을 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몰랐던 나의 마음을 들킨 듯이 불편하면서도 묘하게 쾌감이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펼쳐서 두번째로 읽었을 때는 처음에는 읽고 지나쳤던 문장들 사이에서 김애란 작가의 보물 같은 글귀들을 더 많이 발견했다.
추천사에서 왜 김애란 작가를 사회학자라고 칭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던 책. 단편 소설임에도 강력한 울림을 주는 김애란의 책을 추천한다.
그런 뒤 오대표는 이연에게 갑자기 이상한 걸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정말 궁금한 듯도 하고 마땅한 작별인사가 떠오르지 않아 불쑥 튀어나온 말 같기도 했다.
오대표의 목소리를 듣자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학교에서 배운 서사 이론 하나가 떠올랐다.
‘작가로서 당신이 누군가에게서 뭔가 뺏고 싶다면 그에게 먼 저 그걸 주어라’라는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지금도 소설이나 연극,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너무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면,
사랑이나 어떤 성취 혹은 명예 앞에서 너무 벅찬 감정을 표할 때면 어김없이 ‘저 사람 곧 저걸 잃어버리겠구나’ 예감하곤 했다.
이연은 오대표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어떤 주문을 외듯, 마치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랑에 빠진 사람 처럼,
그 사랑을 어서 잃고 싶어하는 연인처럼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 좋았어요.
– …………..
–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 홈파티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란 등 아래서 은은한 형광녹색으로 빛나는 잔디며
더도 덜도 없이 딱 그 자리에 있어 풍경을 미적으로 만드는 수목이 근사해서였다.
더도 덜도 아닌 적절함.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나도 무수한 시안을 버려봐서 알았다. 힘겹게 만든다 한들 반드시 채택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잔디 위 널돌을 밟고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일층짜리 단정한 목조 주택이 자태를 드러냈다. 더운 나라 건물답게 시원하고 개방적인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돈이 아니라 감으로 꾸민 집. 것도 단순한 감이 아니라 훈련된 미감으로 꾸린 데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햇빛과 바람, 빗물에 색이 바래 순한 나뭇결을 드러낸 문 틀과 창틀, 고상하되 전혀 기름진 티가 나지 않는 담박한 그릇 장, 세간의 배치와 배색,
그럴 리야 없겠지만 투숙객이 혹 초록에 물릴까 다홍과 주홍을 살짝 섞은 간이 화단까지 모든 게 적절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결국 어떤 공간을 우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낡음 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숲 속 작은 집 53
지호와 관광명소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차츰 현지인이 많은 식당에 가고 이름 없는 골목을 해멨다. 관광지에 가지 않는 날엔 시내 카페에서 일했다.
결코 나를 뽑아주지 않을 것 같은 회사에 이력서를 넣거나 동료에게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은 외 주 작업을 했다. 지금도 지호는 내가 직장에서 잘린 줄 알지만 실상은 좀 복잡했다.
언제부턴가 지호에게 회사 얘길 잘 안하게 됐다. 내가 조직 생활의 고충을 토로할 때마다 힘들면 그만 두라’는 말을 너무 쉽게 했기 때문이다.
아마 본인부터가 잘나 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부모 돈으로 이층짜리 커피숍을 할 사람이라 그런지 몰랐다. 지호에게는 뭐랄까. 어려서부터 몸에 벤 귀족적 천진함이 있었다. 남으면 버리고, 없으면 사고,
늦으면 택시 타는 식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진 무심한 순진함이.
학부 땐 그게 귀엽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당해 보여 끌렸는데, 결혼 후 같이 살다 보니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내가 예산 을 맞추려 전전긍긍할 때도 지호는 “그냥 대충대충 해. 별차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별 차이에 대한 감각이 지호와 나의 큰 차이였다.
-숲 속 작은 집
출국 후 되도록 나쁜 생각은 안 하려 했다. 가능한 한 이 도시가 내게 주는 것들을 누리려 애썼다. 나는 이곳의 물가가 싸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했고 때론 잘 만들어진 상품 앞에 서 오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스스로 아름다운 걸 생산하고픈 마음도 컸지만, 그리고 온갖 클라이언트를 만난 탓에 이제 그런 욕구는 많이 사라졌지만, 누군가 오랜 시간과 재능, 정성을 들여 만든 걸 보면 절로 가슴이 뛰었다.
세상에는 정말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운 물건이 있었다. 말 그대로 상품이 아니라 작품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평소 상품(上品)이 아니라 정품(正品)을 납품하기에도 급급한 나로선 경탄할 만한 일이었다.
한번은 지호와 기념품 가게 골목을 누비다 어느 진열 장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망설이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점원에게 전시 상품을 볼 수 있는지 묻자 그녀가 ‘세 개 다 원하느냐’되물었다.
이윽고 유리 깔린 탁자에 돌로 만들어진 집 세 채가 나란히 올려졌다. 달걀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제법 묵직해 보이는 집들이었다. 특히 각 지붕의 특징이 두드러졌는데 하늘색 격자 지붕과 진청색 비늘 지붕, 연회색 빗살 지붕이 아기자기한 매력을 풍겼다
-숲 속 작은 집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알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 욕구, 생존 욕구 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얼마 전 남편이 내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살게 되면 남을 돕고 살자.”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 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자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좋은 이웃 141
언젠가 아빠 생신에 들고 갔을 때 아빠와 엄마 모두 무척 맛있게 먹은 케이크였다.
어쩌면 빵이 이렇게 시면서 달고 상큼하니 맛있느냐고. 케이크 옆에는 기진이 좋은 날 따려고 아껴둔 샴페인이 있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터라 병 표면에 아직 이슬이 맺혀 있었다. 기진이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숫자 1 모양의 하늘색 양초였다. 초에 불을 붙인 뒤 잠시 그 빛을 바라봤다.
그러곤 케이크 속으로 한 손가락을 푹 집어넣어 크림을 듬뿍 떠서 입에 갖다 댔다. 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맛을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거라는 점도. ‘나만 겪는 일은 아닐 텐데. 누군가는 진작 감내해온 일일 텐데.’ 다들 대체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다들 날마다 아무 내색 않고 일터에 나와 있는 걸까?’ 맨정신에, 취기 없이. 기진이 제 앞의 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미 반 쯤 녹아내린 초가 케이크 면에 푸른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초가 다 타기 전에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기진은 그 빛 앞에서 막상 무얼 말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레몬 케이크
하지만 의식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업 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유통기한이 2년이나 지난 립스틱 올 바르는 일도 없었을 거다.
엄마를 돌보며 운동은커녕 화장 도 잘 못한 탓에 요즘 들어 내 모습이 부쩍 늙고 초라해 보였다.
그것도 혼자 지낼 때는 잘 몰랐는데 카메라 앞에 설 일이 잦아지다보니 신경이 쓰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나를 향해 활짝 열린 로버트의 동공을 보자 내 눈동자도 거기 효용하듯 크게 벌어졌다. 실은 며칠 전 나는 화면 속 로버트의 얼굴을 보고 작게 동요했다. ‘저 남자, 날 감상하고 있어’ 란 자각이 들어서였다.
로버트는 욕망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편에 속했는데도 그런 감정이 전해졌다. 동시에 오랜만이다” 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담긴 호감과 호기심 그리고 성적 긴장을 마주하는 것은.
그런데 그게 전혀 느끼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런가?’ 스스로를 의심했다. 헌수와 헤어진 뒤 누군가와 정신적으로도 또 육체적으로도 진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나는 내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인지. 성적 주체가 되는 기쁨인지, 성적 대상이 되는 설렘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섞인 총체적인 무엇일지 몰랐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안녕이라 그랬어 233